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단 편집) === [[김대중]] === || [[파일: 2591_64.jpg|width=100%]] || || 제7대 대통령 선거 || [[김대중]]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낙선하다가, [[자유당]] 소속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자격이 박탈됨에 따라 1961년 [[인제군]] 선거구에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드디어 당선되었으나... 이틀 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이 [[신민당(1967년)|신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결국 둘 다 현실이 된다. 이 선거에서 [[중앙정보부]] 등 관권의 개입이 노골적으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겨우 95만 표(8%) 차이로 박정희를 따라붙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이라는 초강수를 두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72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 망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 10개월간 [[일본]]과 [[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을 통해 반(反)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듬해 1973년 [[이후락]]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가택연금 속에서도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57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여 [[윤보선]]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일으켰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수감당했다가 박정희가 9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다시 가택 연금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당시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https://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19577.html|#]] [[서울의 봄]] 시기인 1980년 4월 26일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지난 정권의 공과 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박정희 정권의 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잘한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하니까 되더라"는 자기가능성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물론 우리 국민의 높은 능력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이점은 지난 정권의 공이다. 앞으로 나올 정권도 이를 더욱 발전시킬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현 정국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려가 된다.", "평화적으로 불행한 사태없이 민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90% 이상의 목표이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004260032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26&officeId=00032&pageNo=2&printNo=10637&publishType=00020|#]] 박정희가 사망한 지 약 20년 후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용서와 포용'을 강조하며 [[김종필]]이 [[DJP연합]]의 상징적 조건으로 내걸었던 '[[박정희대통령기념관|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 208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 지원한다. 1999년에는 [[대구광역시]]를 방문하여 "나는 맹세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했지만 사람 박정희를 미워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를 이룬 것도 있지만 국민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확신감을 갖게 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공이 크다.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라며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https://www.google.co.kr/am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3fsname=news&contid=2012071702780|#]] 김대중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대해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핍박당한 당사자이기에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말했으며, 직접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당시 참여연대·민주노총 등이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라는 단체를 결성해 반대하는 등 저항도 컸지만 임기중인 2002년 1월 착공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의 과(過)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뒤엎고, 인권과 생명을 유린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비판도 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283481?sid=100|#]]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했을 때부터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서로 대립하고 갈등했던 두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만남의 순간은 딱 한 차례 있었다. 1968년 새해를 맞아 당시 [[국회의원]] 김대중은 7살 많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사차 만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7대 총선]]에서 내건 [[목포시|목포]] 지역 [[공약]] 이행을 부탁했고, 박정희는 시원하게 "그래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5분여 동안 나누었던 대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훗날 김대중은 당시를 회고하며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얼굴 어떤 얼굴인가 한번 본다고 갔어.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엄격한 인상 아니야, 냉철하고. 그런데 가니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더라고."라고 말했다.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1832279|#]] || [[파일:parkghandkimdj.jpg|width=100%]] || 2004년 8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직접 찾아와 "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고초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박정희 정부]] 때 [[김대중 납치 사건|받았던 탄압]]에 대해 용서를 구한 적이 있다. 김대중의 반응은 "죽은 박정희가 살아 돌아와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만 같았다."였다고. [[https://youtube.com/shorts/jZ22Jib0q5A?feature=shar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